🌻수요일의 레이

자주 뒤돌아보는 습관을 가진 방송노동자.

심신이 허약해지면 영화를 처방하거나 땀을 흘리러 간다.
때때로 멋진 빵을 굽는다.

제게는 스트레스 대처법으로 셀프 *영화 처방을 내리는 버릇이 있어요. 여기서 '영화 처방'이란 제 멋대로 이름붙인 용어로, 특정한 스트레스 상황에 빠졌을 때 그 감정을 몰아내거나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한 시도로 신중하게 고른 영화를 시청하면서 마음을 달래는 행위를 뜻합니다🙂 보는 사람이 이입할 구석이 많을수록 처방용으로 적합하기 떄문에, 주로 세상과 온전히 화합하지 않은 여자들이 나오는 영화를 볼 때 위로를 받아가는 편이에요.

지난달에는 레아 세이두가 나오는 <어느 하녀의 일기>를 보았는데요.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요약하자면, 유능하고 교양있지만 늘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고 다니는 아름다운 하녀 '셀레스틴'이 경박한 주인들을 위해 일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선택지에 물들고, 종국에는 늙은 동료 하인과 야반도주하는 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네?) 

잘 구워진 고구마가 갑자기 목에 턱 걸린듯 마무리되는 찜찜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영화가 좋았습니다. 실은 보면서 약간 속이 시원해지는 순간도 있었는데요. 위선적인 상류 계층 사람들이 내비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그들을 지켜보는 일꾼들의 노련하고 반항적인 표정이 내심 반가웠거든요. 주인상에 내놓을 과일 몇조각을 야무지게 집어먹고 추궁하는 마님에게 천역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셀레스틴의 태도에서는 현대의 직장인들이 살짝 겹쳐보이는 거 같기도 합니다. 언뜻 순종하는 듯 하지만 내리깐 눈꺼풀 아래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주인보다도 많이 알고 있는 일꾼들의 모습은 재밌고 무시무시한 데가 있지요. 

세상에는 자유로운 여자들을 꺾으려는 오만가지 이벤트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름답고 똑똑하고 긍지 높기까지 하지만 결국 고용인이기 때문에 누구의 가족도 되지 못하고 이 집 저 집 옮겨다녀야하는 신세의 셀레스틴을 보면 한때 오만하리만치 당당했던 여성이 자기 파괴를 동반한 주체적 불행과 가까워지도록 만드는 여러가지 함정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세상이 나에게 허용한 것보다 큰 자아를 갖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것, 육체의 매력을 내보이고 기꺼이 욕망 당하는 것, 유해한 상대에게 매력을 느끼고 함께 하기로 결심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여성의 잘못이 아님에도 그 중 한가지 함정에 승복해버리고 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미리 거울치료를 받는 기분도 듭니다. (안돼! 그렇지만 왜 그런지도 알 거 같아! 아!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그래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는 약간의 진실이 포함되어 있고, 욕망받는 것의 즐거움을 순진하게 얘기하기보다는 그 힘에 잡아먹혀 서서히 파멸하는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닿을 때가 있습니다. 영화를 통해서 그런 감각을 수용하고 인정할 수 있어서 조금은 덜 외롭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어둡고 찜찜한 결말일지언정 선택을 내리는 캐릭터들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다행스러운 점은 <어느 하녀의 일기>가 1900년대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이므로 영화에서 일어나는 일은 실제의 제 삶과 멀리 있다는 것이겠지요. 현실을 닮은 영화를 볼 때는 정서적 안전거리를 확보해두는 것도 필요하거든요.. 결과적으로 저는 이날 영화를 보며 같이 분노하고 비웃으며 쓴 맛을 보았지만 조용히 어둠 속에서 잠들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영화처방'은 진짜 문제를 해결하는 아주 건강한 방법은 아닙니다. 하지만 큰 비용과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온건하게 분노, 슬픔, 우울을 비롯한 여러 감정을 투영하고 수용할 수 있어 제게는 꽤 잘 먹히는 야매 테라피입니다. 영화 처방의 연장선상으로, 때에 따라 적절한 제철 영화를 보는 것도 마음에 든든한 안정감을 줍니다. 저는 알맞은 영화를 골라 보는 것이 겨울을 조금 더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우연하게 때에 맞는 영화를 만나 감정의 소화율이 높아지는 저릿한 기분을 아실 겁니다. 울적할 때는 단 음식이 생각나고, 답답할 때는 매운 음식으로 속풀이를 하고, 추울 때는 속을 데우는 뜨끈한 국물 요리를 찾듯 영화에도 상황이나 계절감에 따라 그 맛이 배가되는 때가 있지 않나요? 보는 이의 마음과 시간이 연결되는 알맞은 시절에 만나는 영화를 두고 ‘제철영화’라 불러보겠습니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캐롤을 틀어두는 12월에는 특정한 무드의 영화들이 다시 재생됩니다. 제철을 맞이한 영화들이 다시 깨어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 말은 로맨틱 코미디, 가족 영화, 애니메이션의 시간이 돌아온다는 의미기도 하죠 :)

벌써 1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서울에는 눈이 내리기도 했는데요. 본격적인 겨울 시즌을 앞두고 우리의 연말을 채워주었던 좋은 영화들을 다시 떠올려 보아도 좋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12월 언제 틀어도 무난하게 즐거운 대중적인 겨울 영화 목록을 몇개 적어봅니다.

🤶: 레이가 100번 이상 본 애니메이션 영화. 여러분... 각종 음모론과 20세기 유럽을 뒤집은 사기극을 양산한 '아나스타샤 생존설' 들어보셨지요? 이 영화는 러시아 혁명에 의해 폐위되고 이후 온 가족과 함께 지하실에서 총살되는 운명을 맞은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4녀 아나스타샤 공주가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설을 차용해 상상력을 더한 픽션입니다.

많은 분들이 디즈니 영화로 오해하고 있지만, <썸벨리나>를 만들었던 20세기 폭스사의 야심작이었어요.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차별화로 당대의 유명 배우들을 성우로 기용하고, 디즈니 출신의 애니메이터 '돈 블루스'를 감독으로 내세웠지요. 심지어 이후에 <아나스타샤> 속 빅 마우스 박쥐를 주인공으로 한 외전 <바톡>도 만들었는데요. 상당히 괴랄한 사업적 결정이죠. 지금은 폭스 스튜디오가 디즈니에 인수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디즈니 플러스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답니다. 참으로 웃기는 운명의 장난이군요! 

후대에 DNA 검사를 통해 실제 아나스타샤는 가족과 함께 그날 지하실에서 처형되었다는 비극적인 사실이 밝혀음에도 출생의 비밀, 망국의 공주, 하인과의 로맨스라는 자극적인 소재가 버무려져 고자극 동화로 재탄생한 이 영화는 여전히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혁명하자며...)

가족과 뿌리를 간절하게 찾는 고아 소녀 '아냐'의 노래와 영화 속 쓸쓸한 겨울의 이미지는 제게 여전히 강력한 향수로 남아있어요. 게다가 애니메이션 최초(?)로 악당과 육탄전을 벌이는 당찬 프린세스를 볼 수 있습니다.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파리로 이어지는 여정에서 보이는 풍경이 훌륭하게 묘사되어 있고, 2D 시대의 선화와 영화 전체에 감도는 따뜻한 붉은색과-황금색의 조화가 아름답습니다. 목소리 연기를 담당한 맥 라이언과 존 쿠삭의 케미도 아주 사랑스럽고요, 그리고 끝내주는 OST들이 수록되어 있답니다!

그 모든 역사 왜곡과 자유세계의 승리 직후 미국인들이 도취되었던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에 각인된 사랑은 지울 수가 없나 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경쟁 국가에서 신돈을 악당으로 내세운 로맨스 영화를 창작했다고 상상해보세요!) 어린시절의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못생긴 타협이 필요한지,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겠지요? 그래도 저는 이 영화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매년 다시 꺼내본답니다. 복잡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추천합니다! 

<작은아씨들> 2019년 버전과 1994년 버전

🤶: 94년 버전에는 사랑스럽고 평온한 겨울의 무드가 살아있어서 다시 보는 재미가 있었어요. 다만 저는 그레타 거윅의 2019년 버전을 조금 더 좋아하는데요. 작가로 당당하게 선 조가 자매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책을 썼고, 독일 교수와의 사랑과 결혼도 그 창작물의 일부였다는 거윅 감독의 해석이 훨씬 맘에 들어요. (여러분도 그러실 거 같습니다!😉) 그리고 조가 자긍심 가득한 얼굴로 붉은 책등을 입은 자신의 책을 들여다보는 장면 있잖아요. <LITTLE WOMEN>의 저자 자리에 '조 마치'의 이름이 찍혀있는 걸 보고 느꼈던 짜릿한 기분,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거기에서 다들 찡하지 않았을까요? 책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들은 조에게 이입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저도 어릴 땐 '조'가 되고 싶었지만, 살면서 '메그'의 마음을 더 자주 떠올리게 되는 건 재미있는 변화 같습니다.   

<헝거게임> 4부작과 프리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
🤶: 평범한 행복의 소중함을 깨우는 불편한 상상력이 담긴 판타지. 근 20년간 변화무쌍하게 극장가 트렌드를 이끌었던 청소년 판타지 블록버스터 트렌드의 가장 최근 종착역(이라고 혼자 주장하는 편)

<해리포터>는 청소년에게 마음껏 꿈꾸고 보상을 챙취할 수 있는 모험과 마법의 세계를 선사했고 자라나는 세대가 꿈을 꾸도록 이끌었습니다. <트와일라잇>으로 대표되는 틴에이지 인외 로맨스 플로우는 전세계의 소녀와 엄마들을 성적 욕망을 직시하게 만들었죠. 그 후 찾아온 디스토피아 붐을 이끈 시리즈가 바로 <헝거게임>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끌고 영화화되었던 <메이즈러너>와 <다이버전트>도 비슷한 갈래인데요. 그러고보니 지금은 뚜렷한 틴에이지 판타지 영화의 새로운 경향이 아직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거 같지 않나요? 요즘은 10대 문학과 대중문화를 가르는 경계성이 모호해지기도 했고, 단기간에 제작비를 회수해야하는 리스크가 큰 영화 산업보다 드라마 시리즈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분화되었다는 인상도 들어요. 어쨌든 저는 우리가 속한 현실의 상상력이 디스토피아와 거리를 점점 좁혀가고 있다고 느끼므로 아마 다음 청소년 블록버스터의 트렌드가 이어진다면 그 역시 디스토피아'B가 되지 않을까, 하고 혼자 생각하는 편입니다.
 
어쩐지 앞으로의 시간은 살아 있기 때문에 잊지 말아야할 연대가 필요했던 시절로 기억될 거 같은 궁예가 드는데요. 2024년을 살아가야할 우리들을 위해 인사를 건넵니다.

'해피 헝거게임! 그리고 확률의 신이 언제나 당신과 함께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