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의 레이

자주 뒤돌아보는 습관을 가진 방송노동자.

심신이 허약해지면 영화를 처방하거나 땀을 흘리러 간다.
때때로 멋진 빵을 굽는다.

바싹 일어난 손톱 거스러미가 두려운 계절의 신호를 알린다. 겨울이 온다. 한랭건조라 했던가! 시베리아 기단의 찬바람이 내려오는 우리나라 겨울철 기후는 건조하고 바람이 많이 분다. 이 바람이 어찌나 날카롭고 건조한지 극한의 건성인 내 피부는 겨울바람 앞에 저항없이 발갛게 트고 상처가 난다. 이맘때부터 부르짖는 친구들의 이름이 있다. 세라마이드여! 히알루론산이여! 판테놀이여! 보습제를 여러 번 쌓아 올린 스킨케어 루틴이여! 건성 김미연들이여! 매년 이맘때쯤 손과 가슴 아래엔 건선이 생기고 나는 밤마다 건조한 피부를 긁어대며 보습크림을 더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잠든다. 다음 주에는 날씨가 또 영하로 내려간다. 너무 늦기 전에 좋아하는 코트를 입어야겠다. 

겨울은 따뜻하지 않아, 당신이 두른 것들이 온기를 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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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동안 꾸준히 겨울을 싫어했다. 겨울이 가까워진다는 건 곧 한 해가 끝난다는 의미다. 나는 이 시즌이 되면 점점 슬퍼지고 동시에 들뜨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분이 물렁물렁해지다가 나중에는 이성을 반쯤 놓아버린다. 어떻게든 축하하지 않으면 울적해서 견디기 힘들다. 백화점은 11월부터 대목을 준비하며 내 원룸 면적보다도 훨씬 큰 현수막을 외벽에 건다. 무시하기 힘든 이미지다. 크고 아름답고 호화롭다. 지나치게 큰 트리와 사랑스러운 동물 인형과 반짝이는 불빛 사이에서 젊은 여자가 선물 더미에 파묻혀 행복하게 미소짓는다. 해피 홀리데이-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선물하세요! 그 마음에는 0이 여러 개 붙어있고 화려한 브랜드 로고가 각인된 두꺼운 쇼핑백 속에 감춰져 있다.

너무 많은 선물 상자가 쌓인 이미지를 볼 때 나는 약간 외로워진다. 이맘때 서울의 도심에서는 가족과 연인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많이 보이고, 우리는 기꺼이 지갑을 열고 소비에 관대해져야 할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저 선물 상자에서 당장이라도 소비주의가 튀어나와 (기이할 정도로 점잖아 보이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 천진하게 외칠 거 같다. 겨울은 기쁨과 축하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 이모를 위해서도 사고 이모가 아끼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돈을 써요. 그게 행복한 겨울의 비결이죠! 그래요, 사랑받고 싶다면 카드를 써요!

이런 거짓말쟁이… 나는 멍청하게 광고를 쳐다보다가 이내 입매를 단단하게 하고 걷는다. 이런 걸 너무 오래 보고 있으면 덜 행복해진다. 마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가장 좋은 걸 살 수 없어. 콜라인 줄 알고 간장을 삼켰을 때처럼 기분이 짜다. 문득 사람들이 이런 감정을 어떻게 견디는지 궁금해진다.

백화점 앞을 걷는다. 몽환적인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젊은 모델들의 캠페인 이미지 앞을 지나간다. 사진 속 그녀들이 어쩐지 매년 조금씩 더 흥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내 인생은 정말 멋지고 권태로워. 겨울의 소비는 계급의 경계를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꼭 필요한 것과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 들뜬 분위기에 가려져 혼재하는 시즌이다.

포근한 담요와 케이블 니트와 코코아 한 잔의 여유로 구성된 ‘따뜻한 겨울’에는 모순이 있다. 겨울이 따뜻하다고 하던 지인들 앞에서 속으로 하던 볼멘 주장이 있다. 겨울은 따뜻하지 않아. 우리가 두른 것들이 온기를 주는 거지. 따뜻한 겨울을 체험하려면 약간의 사치가 필요하다. 날씨가 추워지면 편의를 위해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단순히 이벤트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에 드는 지출까지 커진다. 난방도 더 많이 떼야 하고, 옷도 더 많이 걸쳐야 한다. 가스비는 전기세보다 높고, 겨울옷은 여름옷에 비하면 어느 정도 값을 주고 사야 입을만하다. 겨울에는 야외에서 오래 걷거나 공원에서 한가롭게 산책하기도 어렵다. 누군가와 시간을 보낼 때도 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실내로 가야 한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더 많이 껴입고 단열재를 붙이는 가정이 얼마나 많은지. 춥게 지내도 전년보다 훨씬 오른 고지서에 한숨 쉬는 사람들이 있다. 한파에 수도관이 얼어붙으면 구옥에 사는 사람들은 골치가 아파진다. 눈이 내려서 굳기 시작하면 노인들은 훨씬 조심해야 한다. 추위에 관절과 근육이 경직되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다가 길에서 미끄러지기도 한다.

바람이 많이 부는 시린 날씨에 못생기고 따뜻한 패딩을 입는다. 패딩은 마찰할 때마다 베개 같은 소리를 내는 데다가 입은 사람의 부피를 키워서 출퇴근길 대중교통에서 빽빽한 인구밀도를 더욱 높인다. 만원 전철 안에서 빵빵한 초코파이처럼 개별 포장된 사람들이 흔들흔들 떠다니며 부딪힌다. 겨울이 되면 시민들은 철 상자에 갇힌 커다란 펭귄, 웃지 않는 미쉐린이 된다. 어떤 사람은 2022년 10월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도 밀면 어떻게든 길이 생긴다고 생각하는지 아예 체중을 실어버린다. 저기요 다른 인간을 누르면 안 됩니다... (뽀-드득) 남은 사람 중에 저 좁은 틈에 들어가도 될지 초조해하다가 지각이 더 무섭다고 판단하고 엉덩이를 뒤로 미는 이들과 함께 열차는 출발한다. (내적 탄식하는 사람들의 굳은 미간과 열심히 자리를 만들 때 나는 패딩 소리.)

아침부터 소모되는 에너지가 상당하다. 이런 사소한 일상의 경험이 누적되어 서울 사람들이 조금씩 더 무뚝뚝해지고 남에게 더 무심해진다는 망상을 해본다. 매일 아침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시는 직장인 여러분! 여러분은 꽤 멋지고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걸 잊지 말아요!

아무래도 겨울에는 행색에 더 신경 쓰게 된다. 겨울옷은 무겁고, 세탁도 더 까다롭고 부피도 많이 차지하고 가격도 비싸다. 좋은 소재로 된 코트는 값을 주고 잘 관리해 주어야 오래오래 입을 수 있다. 막스 마라를 10년 동안 입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당장 수백만 원짜리 외투에 수많은 기회비용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나는 허영심이 있어서 외투를 여러 개 두고 돌려 입고 싶어한다. 그래서 중저가 코트를 3년 주기로 입는 데 만족하고 만다. 아직까지는 충분하다. 가끔 취향과 계급이 불일치해서 약간 가슴이 아픈 것 빼고는 다 괜찮다.

위의 서술에서 이미 들킨 것처럼 나는 코트를 정말 좋아하는데, (넉넉한 코트를 둘렀을 때 몸에 적당한 각이 지는 그 느낌이 편안하다고 느낀다) 한국의 한겨울 날씨에 기어이 코트를 입으려면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생존보다 멋을 중요시하던 고집스런 시기가 있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취향을 포기하고 두툼한 패딩을 입고 있다. 타협하면 편하고 서글프다.

물론 한 겨울에도 체력을 걸지 않고 코트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이 있기는 하다. 자차를 끌고 나오거나 차로 데려다주는 누군가가 있어서 주차장에서 주차장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경우.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외출할 수 있는 사람과, 자가용 타고 이동할 수 있는 사람의 시간과 채비는 같지 않다. 추운 날에 자기 몸을 움직여 멀리 이동하는 사람의 채비는 가볍기 어렵다. 바리바리 싸매고 많은 짐을 챙겨 온 사람과 휴대폰만 들고 약속 장소에 올 수 있는 사람이 만드는 대비가 있다. 겨울에 파지를 수거하는 노인 앞으로 매끈한 검은 세단이 지나가면 그 차이가 너무 또렷하게 느껴진다. 부의 격차가 더욱 선명해지는 이 계절이 곤혹스럽다.

하지만 내가 겨울을 싫어하는 가장 사적인 이유는 기억들 때문이다. 이상하게 겨울에는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더 선명하게 남는다. 내가 겨울에 더 약해지는 사람이라서 그런걸까. 겨울에 생긴 기억은 얼룩처럼 마음에 밴다. 빨아도 사라지지 않고 좋은 것을 보아도, 땀을 흘려도 잊혀지지 않는다. 얼룩의 흔적은 지긋지긋하게 남아서 다음 겨울이 되면 태연하게 일상에 들어와 있다. 더러운 얼룩은 오랜만에 만난 옛 동료의 얼굴 뒤에 묻어 있고, 강원도로 가는 고속도로와 설산에 고여 있고, 전나무 숲 사이에 불결하게 살아있다. 고립된 밤에 얼얼하게 부르튼 뺨 위로 눈이 내리면 나는 그냥 다 놓고 엉엉 울고 싶어진다. 살면서 여름을 보낼 때 딱히 더 행복했던 것은 아니나, 내게는 겨울의 괴로운 기억이 더 잘 남고 매년 자꾸 갱신된다. 추위는 우리가 가진 것을 훨씬 또렷하게 만든다. 그래서 누군가는 자꾸 겨울이 따뜻하다고 하나보다.

그 마음을 알 수 있으면 좋겠다. 겨울에 더 좋은 기억을 만들어서, 언젠가는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올해는 아직 크리스마스 선물을 위해 카드를 긁지 않았다. 대신 연말의 색깔이 담긴 커다란 시작사 카드를 몇 개 주문했다. 일러스트레이터 쉬시턴의 작품으로, 설원에서 노래하는 개들과 고양이들이 그려져 있다. 종이가 크고 빳빳해서 바라보고 있으면 풍족한 기분이 든다. 완벽한 가짜 가족과 가짜 연인보다 사람처럼 묘사된 동물 그림이 내게는 훨씬 사랑스럽다. 연말 전에 아끼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못생긴 손편지를 적어줄 생각이다. 겨울나기를 준비할 시간이 온다!

💌인사하며

어떤 사람들은 여름의 불편을 싫어합니다. 강한 햇빛, 높은 습도, 자주 내리는 비, 에어컨 바람에 노출되어 있다가 걸리는 감기, 땀으로 축축하게 젖는 옷, 왕성하게 활동하는 각종 곤충과 벌레, 노출되는 맨살, 피크 시간대 대중교통에서 강제로 맡게 되는 낯선 사람의 체취…. 분명 여름의 가까운 거리감은 불편할 수 있지요. 그러나 여름에 아무리 단점이 많다 한들 그 사실이 겨울을 따뜻하게 만들 수는 없고, 춤을 추고 싶게 만드는 얇은 옷의 해방감이 존재하지 않는 척할 수 없고, 오래 떠 있는 해와 외투 없이 걸을 수 있는 밤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아주 주관적인 해석이에요.

그래서 읽어 주신 분들께 사소하지만 제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질문을 해봅니다. 여러분은 여름과 겨울 중 뚜렷한 선호를 고를 수 있나요? 여러분이 편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들과 계절이 관련이 있는지 떠올려 보세요. 어쩌면 어떤 계절의 사적인 기억을 더 기껍게 여기는지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럼 모두 평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