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의 레이

자주 뒤돌아보는 습관을 가진 방송노동자.

심신이 허약해지면 영화를 처방하거나 땀을 흘리러 간다.
때때로 멋진 빵을 굽는다.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나누어 먹어요

친애하는 동료 두유가 지난 레터에서 ‘너는 겨울을 대표하니 어서 나를 행복하고 들뜨게 해 주렴’. 하는 마음을 담아 크리스마스를 표현했듯, 분명 크리스마스는 겨울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캐롤과 웃음이 있는 날들을 어떻게 아쉬워하지 않고 보내줄 수 있을까?

매년 12월 26일과 30일 사이의 풍경은 끝내주게 멋진 꿈을 꾸고 깨어난 다음날처럼 어색하다. 거리와 상점에서 덜 치운 크리스마스 장식과 오너먼트를 여전히 찾아볼 수 있는 데다, 짙은 연말의 농도에 취해 흥청망청 놀고 싶은 마음이 기분 좋은 숙취처럼 남아있다. 카페들은 성탄 특수를 조금 더 붙잡아 보려는 듯 은근슬쩍 계속 캐롤을 트는데, 일년에 한번 오는 이 시즌을 최대한 오래 이어가고 싶어 하는 사장님들의 마음이 반영되는 거 같아서 재밌다.

문득 1인 사장님들의 일상을 상상해 본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폐를 채우는 겨울에도 이른 시간부터 가게 문을 열고, 커피 머신을 다시 조립하고, 접시의 먼지를 닦고 정리하고, 커피와 함께 판매할 빵을 구워놓고,  무수한 설거지와 낯선 사람이 만드는 소음 속에서 친절을 지켜내는 일. 그리고 매일 매일 한결같이 혼자 매장을 지키며 이어가는 생활은 아닐까. 카페를 운영하는 일은 좋은 취향을 뽐내며 자유와 고독 사이의 이상적인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삶의 방식처럼 미화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 일에는 동네의 분위기에 맞춰 적당한 온도의 친절과 요령을 터득해야 하는 불안하고 외로운 측면도 포함된다. 해가 지고 캄캄해진 골목에서 유난히 따스한 빛을 내는 공간을 지키는 사람과 사람이 모두 나간 가게의 불을 끄는 그 순간까지 일정하게 손님을 기다리고 맞이하며 하루 종일 한 공간에서 커피를 내리는 이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연말의 힘을 빌려 즐거울 구석을 이어가는 것도 좋겠구나, 싶다.

이쯤 되면 어떤 독자는 얘가 카페 사장님 얘기를 왜 이렇게 길게 하는지 의아해할 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에게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새로운 개인 카페에 가면 사장님의 연배와 디저트 라인업을 관심 있게 살피고 종업원 숫자를 파악한 뒤, 이 시간대에 주로 어떤 손님들이 이 공간에 방문하는지 훔쳐보곤 한다. 그러곤 내가 사장이라면 벽에는 어떤 그림을 걸고, 선곡은 어떻게 할 지, 디저트는 어떻게 세팅해서 얼마에 판매할지 슬그머니 상상해 본다. 마치 예습하는 산업 스파이처럼…

이런 상상을 하는 이유의 3할 정도는 주변인들이 나를 통해 자꾸 예비 자영업자의 가능성을 보기 때문이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디저트를 선물한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그 친구가 좋아할 거 같은 재료나 식감을 추측해서 잘 먹을 거 같은 품목을 만들어가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그즈음 만들고 싶어서 안달 난 품목을 구워서 약속 장소에 가져간다. 물론 늘 성공은 아니지만, 좋은 기억을 갖고 디저트를 먹어본 친구들은 오랜만에 나를 만나면 꼭 ‘카페 언제 차리냐’고 덕담 섞인 악담을 한다. 그러면 내가 슬프게 웃으며 '안돼안돼. 자본금이 없어!' 하고 에둘러 가능성을 차단하는 게 그 대화의 정해진 패턴이다. 하도 여러 사람에게 이 얘기를 반복해서 듣다 보니 결국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는 정말 카페를 차리게 될 수도 있나? 하는 가능성을 생각해보다 혼자 고개를 휘젓고 심란해한다.

그래도 만약 내가 카페를 운영하는 1인 사장이 된다면 12월 내내 다양한 패턴의 어글리 스웨터를 돌려 입고 수줍은 손님들이 매장에서 성탄의 분위기를 흘깃댈 수 있도록 눈사람 파블로바 같은 메뉴를 내와서 기분을 내려 애쓸 거 같다. (그렇다!! 눈사람 파블로바! 눈사람 모양으로 구운 둥근 머랭 케이크와 큐브 모양으로 작게 자른 생과일과 허브를 접시에 같이 내서 슈가파우더를 뿌리면 얼마나 귀여울까!) 이런 환상이 매출 압박에 구애받지 않는 카페 로망 속에서나 가능하다고 쳐도 상상만큼은 즐겁다. 비록 카페를 창업하려는 마음도, 계획도 아직 요원하지만 뭐 어때? 나는 내 디저트의 지휘자고 내 플레이리스트의 디제이며 열 평 남짓한 토끼굴의 왕이다. 창업하는 실수만 벌이지 않는다면 언제고 정성껏 만든 수제 디저트를 나와 내 친구들에게 대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어떤 친구들이 내게서 본 자영업자의 가능성은 달리 말해, 좋은 사람을 환대하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박애주의나 상업적인 자질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나는 관심 없는 사람에게 디저트를 나눠줄 생각이 추호도 없다. 이미 수년간 수제 디저트를 뿌려보았기 때문에 구워주고 싶은 사람과 구워줘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을 분간하는 나름의 재주가 생겼다. 디저트를 만드는 데는 많은 시간과 재료와 마음이 들어가고, 오래 굽기 위해서는 그걸 중요한 사람들과 나누는 게 더 낫다고 체득했다.

다른 사람과 나눠 먹기 위해 굽는 디저트로는 뭐니 뭐니 해도 홀 케이크가 제일이다. 나는 중요한 날을 기념하고 싶을 때 케이크를 굽곤 하는데, 맛을 내는 데만 열중하지 크림을 짜는 파이핑과 데코레이션에는 영 자신이 없어서 늘 '러스틱 (시골풍)'이라고 우기는 투박한 스타일의 디자인을 고수한다. 모양이 엉성하다는 뜻이다. 그래도 버터와 크림을 아낌없이 넣고 재료와 어울리는 리큐르까지 더한 수제 케이크가 시중에 파는 보급형 케이크보다 훨씬 향이 풍성하고 맛이 좋다. 가끔 레시피에서 살짝 이탈해 가끔 다른 재료를 섞어보기도 하는데, 간혹 아주 만족스러운 조합을 찾을 수도 있다. 호박 케이크에 올릴 크림에 밤잼을 섞거나, 레몬 파운드에 코코넛 가루를 뿌리거나, 초콜릿 컵케이크에 베일리스를 넣으면 상당히 잘 어울린다.

다만, 작정하고 새로운 디저트를 만드는 날이면 결과물을 망치는 징크스도 있었다. 일례로 나는 완벽한 원통형 표면에 각종 깍지를 동원해 색색의 크림으로 화려한 데코를 한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기 두려워하는한다.  2-3년 전쯤 중요한 날에 하루 종일 딸기 생크림 케이크 앞에 매달린 적이 있었는데, 제누와즈 시트도 제대로 부풀지 않고 크림이 무너진 결과물이 나왔다. 실망한 나머지 비뚜름한 케이크 앞에서 화가 나고 속상해서 난 할 줄 아는 게 없나 봐, 하고 바보처럼 엉엉 울어버린 날이었다. 왜 그렇게 케이크 하나에 자아 의탁을 했던 걸까 싶어 민망하기도 하지만.... 지금도 생크림 케이크는 잘 만들지 않는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올해에는 멋진 디저트 카페에서 예약 구매한 제품이 부럽지 않을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들자고 다짐했다. 무슨 케이크를 만들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부쉬 드 노엘에 도전하기로 했다. 부쉬 드 노엘은 통나무 모양으로 장식한 초콜릿 롤 케이크인데, 길쭉한 케이크에다가 초콜릿을 입혀 섬세하게 나뭇결을 표현하고 데코스노우와 붉은 열매, 버섯 모양의 쿠키를 더해 눈 내린 숲 속의 나무둥치를 연상시킨다. 레시피를 여러개 찾아보며 초콜릿을 겉에 붙이는 디자인과 (초콜릿이 바스러지는 식감이 더해져 재밌겠지만, 템퍼링을 하거나 얇은 초콜릿을 만들다가 망칠 가능성이 너무나 다분했다) 가나슈를 발라 나무껍질을 표현하는 디자인 사이에서 고민하다 내 마음건강을 위해 조금 더 쉬워 보이는 2안의 가나슈 디자인으로 결정했다. 크림이 가득 들어가는 롤케이크는 빨리 물러지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당일에 완성해서 애인과 함께 나눠 먹을 계획을 세웠다. 

마침 부쉬 드 노엘을 준비하기 전에 이틀 정도 시간이 남았다. 오전에 일어나서 버터 스펀지를 두 판 구웠다. 오븐에서 갓 나온 버터스펀지는 골든브라운색을 띄었고, 그을린 곳 없이 촉촉하면서 묵직해 보였다. 신이 나서 겨우내 만들어둔 딸기 콩포트 병을 새로 따고 냄비에 졸였다. 마스카포네 치즈에 휘핑크림을 섞어 오밀조밀하고 퐁신한 크림도 쳤다. 평소보다 훨씬 잘 나온 케이크 시트를 자를 때 고소한 버터향이 폴폴 나서 내가 홀랑 먹어버릴까, 하는 유혹도 잠시 느꼈지만 케이크를 받고 좋아할 친구를 상상하며 꾹 참았다. 시트에 딸기 시럽을 두껍게 올리고 크림을 발라서 빅토리아 케이크를 만들었다. 네모낳게 만든 첫번째 버전은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그날 가져갔고 둥그렇게 만든 두번째 버전은 가까운 동네에 사는 고마운 친구를 위해 냉장고에 보관했다. 물론 내가 늘 만들던 방식대로 시골풍으로 투박하지만 반죽을 할 때 너희를 생각하는 마음을 조금 흘려 넣었으니 맛있을 거라고 자부하며. 이런 저런 이유로 매번 챙기기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누군가 품에 안겨주는 크리스마스에 케이크가 있으면 괜찮은 날도 썩 좋은 날이 된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케이크를 구워보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직접 들려주면 좋겠지만, 말이 서투르고 애교가 없어서 대신 빵 사이에 끼워서 나누어 보낸다. 

아! 부쉬 드 노엘은 어떻게 되었냐고? 다행히 망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주 귀엽게 나왔다. 롤케이크를 말다가 부숴뜨리지도 않았고 크림이 분리나지도 않았다. 가나슈를 샌딩할 때 얇은 시트가 자꾸 찢어지긴 했지만 그 조차도 뜯겨진 나무껍질처럼 보여서 나쁘지 않았다. 통나무를 장식할 거리를 넉넉히 준비하지 않아서 머랭 쿠키 대신 초코송이를 꽂아 버섯을 만들고, 작게 자른 케이크 시트 조각을 돌돌 말아서 솔방울인 척 세워놓았다. 우리는 크랜베리 소스를 얹은 스테이크가 포함된 멋진 만찬 후에 통나무를 잘라 먹었다. 나의 중요한 날 케이크 징크스는 서서히 깨지는 중이다. 낯선 케이크를 대할 때 원래의 나보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대신 사랑하는 마음과 넉넉한 여유를 넣으면 괜찮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걸 배워가면서.

💌인사하며

다들 포근한 성탄 연휴 보내셨나요?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보내는 크리스마스 레터가 다소 뒷북 같기도 하지만 구독자 여러분께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좋은 장소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셨을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전 사실 이번 주 내내 크리스마스인 척해도 될 거 같아요. 일생 동안 12월 초부터 성탄 분위기로 사람들을 들뜨도록 훈련시켜 놓고 25일이 땡! 지났다고 해서 ‘좋아, 이제 크리스마스는 끝났어! 당장 일상으로 복귀해!’ 하고 바로 모드를 전환 시키기란 다소 어려운 일이잖아요! 원래 기분의 흐름에는 그라데이션이 있기 마련이지요. 특히 어려운 때 일수록 다 같이 좋은 일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우리는 어색해하는 대신 당당히 크리스마스의 잔향을 맡으며 남은 한 주를 최대한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일요일이 되면 흘러간 2023년에 작별을 고할 테니까요.

오늘도 레터를 기다려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전하며

저는 잠시 인사를 드려요. 안녕,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