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두 시 즈음, 배가 고파서 빠르게 만들 수 있는 애호박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를 해 먹기로 했다. 남편이 마늘을 까서 다지는 동안 나는 애호박을 썰면서, 이번주 일요일 12월 31일에 시할머니 댁에서 모일 때 편지를 써서 작은 선물과 함께 드리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냈다. 다른 가족들 선물도 준비하겠지만 할머니에게 꼭 튀르키예어로 편지를 쓰고 싶었다.

잿빛이 도는 파란 눈, 높게 솟았으나 끝이 살짝 내려간 코, 꼭 다문 얇은 입술과 날렵한 턱. 할머니는 동유럽 발칸 반도에 사는 할머니들처럼 날카롭고 다소 고집스러운 얼굴에 항상 머리 스카프를 쓰고 있다. 그런 할머니가 우리를 만나면 환하게 웃는데, 그 순간 얼굴에 있던 뾰족한 선들이 둥글게 휘어지며 포근한 면들이 남는다. 식사 하면서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면 할머니는 웃으며 내게 윙크를 한다. 플러팅이 아닌 윙크는 어떤 마음, 어떤 표정으로 해야하는 건지 몰라서 나는 고개를 흔들며 웃기만 한다.

할머니와 낯선 나라에서 온 손주 며느리는 가족 구성원 중 제일 대화를 이어나가기 힘든 조합이다. 크게 말하면 내가 튀르키예어를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할머니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지만 통역해줄 사람 없이 우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악조건 속에서 나는 할머니에게 이것저것 질문한다. 식탁에 올라온 채소들을 보며 할머니는 예전에 어떤 작물을 키웠는지 궁금해하고, 여행 사진들을 보여 드리며 할머니의 첫 이스탄불 여행은 어땠냐고 되묻는다.  

할머니가 자꾸 알고 싶어진 계기는 할머니와 내가 가진 공통점 때문이었다. 둘다 청년과 중년 사이에 나고 자란 곳을 훌쩍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기 시작했다. 파트마 할머니는 불가리아 중부 산간 지역 투르크족 마을에서 나고 자라서, 마흔에 남편과 함께 아이들 셋을 데리고 튀르키예로 왔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랐고 서른이 넘어 남자친구를 따라 튀르키예에 둥지를 틀었다. 이민 오기 전까지 할머니는 튀르키예에 가본 적 없었지만 그래도 그 곳이 고향이라고 듣고 자랐다. 접점이 없던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살고 있는 나와 상황이 많이 달랐겠지만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진짜 고향으로 온 할머니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얼핏 보기에 할머니의 삶은 단조롭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알람도 없이 일어나서 기도를 드리고 아침을 먹고 낮잠을 주무시고 나서 오후에는 쿠란을 읽으신다. 청소기를 돌리고 집안 환기를 하는 요일, 빨래를 돌리고 건조대에 널어 두는 요일, 장을 보러 가는 요일도 체계적으로 정해져 있다. 고요한 할머니의 집에는 가끔 할머니가 읊는 쿠란 소리, 볼륨을 크게 틀어 둔 텔레비전 소리만 들린다. 하지만 여든 넘게 살아온 할머니의 궤적을 짚어 가다 보면, 몇 줄로 정리할 수 있는 할머니의 일상에서 쉽사리 유추하기 어려운 다채로운 이야기를 발견한다. 이 모든 시간들을 지나 지금 내가 아는 할머니의 평온함에 도달한 건지 감탄스럽기도 하고, 이야기 속에서 어린 파트마를 만나고 스무 살 파트마를 만난다. 그때 마다 나는 여든 여섯 파트마를 와락 껴안고 어깨에 기대어 반쯤 눕는다.

할머니는 불가리아에서 태어났지만 튀르키예어 밖에 할 줄 모른다. 산 꼭대기에 있는 투르크족 마을에 살기도 했지만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4학년이 되던 해에 할머니의 부모님은 9남매 중 첫째 딸이었던 그녀가 학교를 그만두고 집안일과 농사를 돕길 원하셨다. 학교에 가고 싶었던 파트마는 동네 사람들에게서 불가리아가 소비에트 연방국가이기 때문에 아이들을 의무적으로 학교에 보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부모가 잡혀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날부터 파트마는 마을 어귀로 나가 경찰 아저씨들을 기다렸다. 지대가 높은 산 꼭대기에 살고 있어서 낮에 해가 떠 있는 동쪽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지만 망루에 서 있는 보초병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길목을 살폈다. 내 부모가 날 학교에 못 가게 한다고, 불법 행위를 저지르고 있으니 잡아가 달라고 고발할 생각이었다. 경찰을 못 만난 건지, 만났지만 소용 없었는지 할머니는 기억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학교에 다니기 전, 이맘(Imam, 이슬람교에서 목사와 같은 종교인)에게 아랍어와 쿠란을 배우러 다닌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다른 언니 오빠들이 아랍어를 제대로 읽지 못해서 맞을 때, 제일 어렸던 파트마는 착실하게 숙제를 해가고 곧잘 따라 읽어서 혼나지 않았다. 그때 배운 아랍어를 다 까먹었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지금도 아랍어로 된 쿠란을 매일 읽는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볕이 잘 드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어린 시절에나 본 앨범만큼 큰 쿠란을 펴놓고 한참 읽는다. 할머니에게 기도와 쿠란 읽기는 신앙을 넘어 일상이며 취미 생활이다.

열심히 공부하던 어린 파트마를 떠올렸다. 나는 어린 파트마의 꿈이 궁금해졌다. 할머니에게 어릴 적 꿈이 뭐냐고 묻자, 할머니는 눈을 피하며 머리에 쓴 스카프를 한번 조여 매고 끝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

할아버지가 부모님께 결혼 승낙을 받으러 왔을 때, 할머니도 결혼하겠다고 대답했다는 말이 기억났다. 어쩌면 할머니는 선생님이자 동네 유명인사였던 할아버지와 결혼하면서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도 할아버지랑 결혼하고 싶었어!”라고 말하며 할머니는 몸이 한 쪽으로 넘어갈 듯 웃었다. 수줍고 벅찬 스무 살 파트마가 말을 이었다. 남녀가 유별하던 시대라서 할아버지와 약혼하고 나서도 밖에서 만날 수 없었고, 일부러 언덕 너머 멀리까지 소들을 끌고 풀을 뜯기러 가서 기다리면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언제 올지 정확한 시간도 알 수 없고 약속을 되물을 수도 없는 언덕 위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스카프를 고쳐 매며 연인을 기다렸을 파트마. 불가리아가 전혀 그립거나 생각나지 않는다던 할머니가 그 순간 언덕을 떠올리는 것만 같았다. 웃는 할머니의 눈에서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젊은 모습으로 언덕 아래에서 걸어 올라 오는 장면을 바라 본다.

할머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쓸어 내렸다.

“할머니는 이미 내 튀르키예 선생님이예요.”

아부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할머니 댁에서 한 달 정도 지내는 동안 일년 넘게 늘지 않던 내 튀르키예어 실력이 많이 늘었다. 남편이 통역해준 말을 듣고 할머니는 “저늠(canım, 내 인생. 소중한 사람을 부르는 애칭)”이라고 말하며 내 손을 꼭 쥐었다. 파트마의 꿈, 사랑, 연애. 할머니의 시절을 만나고 나도 할머니의 인생에 녹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