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욕실에서 나온 수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물방울이 머리카락 끝에서 뚝뚝 떨어지도록 내버려둔 채 성큼성큼 걸어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노트북을 열었다. 방석은 축축해지고 수현의 팔과 등에 닭살이 삐죽 돋았다. 늦겨울의 찬 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Trandsgender. 독수리 타자로 영문을 하나씩 누르고 엔터키를 눌렀다. 수현은 중얼거리며 읽어갔다.

  "아이덴티파이 디펄쓰 프럼 티피칼리 아쏘씨에이트 윗 더 섹스..."

  스크롤을 내리자 '태어날 때부터 남성이나 여성이라고 사회가 지정하는 것에 맞지 않다 여기'며 '몸에 대한 감각이 맞지 않다고도 여긴다'는 설명이 있었다. 단편적일 뿐이잖아. 더 찾아볼 의욕도 없이 수현은 노트북을 덮었다. 그는 고개를 내려 몸을 내려다보았다. 욕실 안에서도 느꼈다. 어색하다는 것. 저게 왜 있는지 모르겠다는 감각. 볼록하게 나와 있는 것들. 허리를 숙여 머리를 거꾸로 하고 감던 수현은 불현듯 샤워 헤드에 홀딱 벗은 자신의 몸을 마주했다. 정확히는 가슴과 마주했다. 

  물소리가 멎고 수증기가 옅어질 무렵에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몸을 어색하게 느끼는 시기가 왔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여성이라고 당연히 여겨왔던 것이 흔들렸다. 이것도 내가 유별난 탓인가? 수 없이 되새겼다. 오랫동안 유별난 자신이 이상하고 싫어 괴로웠다. 하지만 수현은 새로운 곳으로 이주하면서 자신을 탓하지 않기로 했다. 나를 유별나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어져야지. 오래된 연인도, 가족들도 예외없이. 사방의 벽에 창문이 달려 있는 집에서 수현은 다짐을 상기했다. 지금의 자신을 바라보려 애썼다. 언젠가 하루 들었던 명상 수업 선생님이 그러하라고 했으니까. 무난한 자기소개를 만들어두는 것도 좋다고 했었는데. 어, 그러니까 저는, 저는 하귤과 감나무가 있는 집의 2층에 세 들어 살면서 직장에서는 회계 업무를 합니다.

  근무지는 가깝지는 않지만 근무 환경은 편안했다. 여성의 재생산권과 퀴어 비퀴어를 차별하지 않는 병원 시설이었는데, 임신중지 수술과 성전환 수술 상담도 가능한 곳이었다. 회계 업무를 맡을 사람을 찾는다고 했을 땐 냉큼 지원서를 넣었다. 면접 당시에는 지원 동기로 '남자친구와의 성관계 후 가려움증이 그 사람도 저도 같이 가졌습니다. 남자친구의 어머니가 저에게만 병원을 가라고 하고 잘 씻어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하는 것을 듣고 화가 났던 경험이 있습니다.'라며 말했지만, 사실 수현은 다른 지원 동기도 있었다. 자신의 몸에 혐오감이 있어 더 몸에 대해 연구하고 싶었다.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에 대한 호기심은 좋아해야 생기는 것이라고 당연하게 여겼다. 

 극심한 간지러움. 두피를 벅벅 긁어야 시원해지고 나중에는 따갑기까지 했다. 그는  손톱 사이에 때가 끼지 않도록 바짝 깎았다. 기름진 머리카락을 바짝 올려 묶었고 어느 날은 질문했다.

  언제부터 나는 더럽고 냄새나는 것으로 내 존엄이 훼손됐다는 걸 알리게 됐을까? 아니, 애초에 존엄한 건 깨끗해야만 하는건가? 더러울 땐 존엄하지 않은 건가? 여성의 몸으로 이상하다 느끼지 않고 잘 지내다가도 한지에 먹 퍼지듯이 몸에 대한 거부감이 진해지는데. 자신을 트렌스젠더로 정체화해도 괜찮을까. 성전환 수술과 호르몬 주사를 맞기 시작해도 괜찮을까. 하지만 난 심지어 남성이나 여성이라고도 느끼지 않은 적도 있었잖아. 어떤 성기의 유무로 나를 결정할 수 있는건가? 자지와 보지라는 거. 자궁과 정관이라는 게, 샤워 헤드에 비친 이 가슴 두 짝이 내 전부라고? 정말? 그렇게 오늘이 되었다. 머릿속을 꽉 채운 문장들에 사로잡힌 채 수현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호로록."

  그리고 그 맞은 편에는 수현의 룸메이트인 루미가 차를 마시며 앉아있었다. 심각하군. 요 며칠 사이 넋이 나간 것 같긴 하던데. 루미는 수현이 부쩍 말이 없어진 걸 알아차렸다. 정말 이상하다고 여겼을 때는, 으름장을 놓은 생활 패턴을 저가 멍하니 하는 걸 본 후다. 자기 팬티랑 루미의 양말은 절대 같이 빨면 안된다고 하더니 그냥 빨고 널고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앞만 보며 멍한 얼굴로 빨래를 야무지게 팡팡 털어 빨래 건조대에 널었다. 회계사의 자존심이라며 고지서가 오기도 전에 생활 요금을 내더니, 그저께 도착한 고지서 종이에 먼지가 쌓이도록 두었다. 이상했다. 

  루미가 한 번 더 따뜻한 차를 우려내 마시는 동안, 수현의 머릿속은 그동안 했던 자기 혐오적인 실수들이 몇 초 남은 파란불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그러다 과거의 자신이 춤을 출 때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말하던 이유를 짜맞추느라 핑글핑글 돌았다. 코가 살짝 번들거리는 걸 보고는 루미는 풋 웃었다. 저러고도 귀엽네.

  루미에게도 있는 버릇이다. 무언가 엉킨 지점을 확인하면 풀릴 때까지 고집스럽게 파고들었다. 자신의 경우는 어지럽지 않을 만큼만 먹는 양을 줄이는 식이었다. 사실 수현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는 대략 짐작이 갔다. 욕실 앞에서 가슴을 움켜쥐고 서 있었으니까. - 평소엔 무덤덤한 자신도 그땐 놀라서 멈칫했지만 - 남들이 너무 별나다, 엉뚱하다, 이상하다 라곤 하지만 수현이나 루미나 코에 기름 끼는 사람일 뿐인데. 간지러움, 뜨거움을 느끼는, 누구를 좋아하든 그 자신일 뿐인데. 

  아, 왜 내가 울 것 같지. 루미는 수현이 볼까 슬쩍 눈을 들어 천장을 봤다. 그때 수현이 추위에 살짝 떨었다. 루미도 바닥을 타고 올라온 늦겨울의 한기를 느꼈다. 뜨거운 물에 샤워나 해야겠다. 천천히 일어나 수건과 속옷을 챙기고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 여기저기 몇 번이나 문지른 듯 밀린 손자국이 있었다. 비누로 루미는 겨드랑이와 배와 엉덩이를 문질러 거품을 냈다. 손바닥을 싹싹 밀어 쫀득하게 거품을 내고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그 거품으로 머리도 감았다. 이럴 때 짧은 머리는 편하고 개운하다. 

  오분만에 샤워를 끝내고 따뜻한 물로 십 분 정도 몸을 데웠다. 수현이 얼른 몸 뎁혀*, 라고 온천탕으로 밀던 일이 기억났다. 수현과 또 온천을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루미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문을 열고 욕실을 나왔다. 기분 전환이 될 겸 좋아하는 오므라이스라도 할까. 꼼꼼히 물기를 닦고 로션을 바르고 잠옷으로 입고 나왔다. 

  루미가 씻고 나오자 한증막 문을 열듯이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수현은 그 수증기와 루미의 바디로션 향에 허리를 세웠다. 추위에 몸을 녹이고 싶은 욕구가, 이 단순하면서도 단일하지 않은 생존 욕구가 울렁거렸다. 그렇다. 청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름에는 몸을 식히기 위해 차가운 물을, 겨울에는 뎁히기 위해* 뜨거운 물을 얹는 것. 어쩌면, 성기 유무 같은 것도 그런 것 아닐까? 성적인 의미만을 함의한 것이 아니라 소변을 누거나 오르가즘을 느끼는데 용이한 것. 호르몬과 유전자, 진화론과 재생산의 언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탐구하고 또 상상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영역 아닐까. 

  "데이 캔 비 원 젠더, 멀티플 젠더, 올 노 젠더. 젠더 뉴트랄 이즈 오픈 어 텀 유즈드 투 데스크라이브 피플 오브 애니 젠더...."

  젠더플루이드는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이다. 즉, 어떤 형태로든 변할 수 있고 흐르며 움직인다. 태어난 몸과 충돌없이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혹은 여성과 남성 그 외에 다른 여러 젠더로 변할 수 있다... 수현은 깃발의 색을 유심히 봤다. 이럴수가, 내가 다 좋아하는 색이야! 핑크,화이트,퍼플,블랙,블루! 수현이 뺨을 양 손으로 감싸고 일어나더니 어깨를 펴고 한 껏 자신있는 포즈를 취했다. 수증기 향을 맡고 수현은 생각했다. '지금 샤워하면, 젠더플루이드로 정체화하고 첫 샤워인거야?' 어디서 온 건지 모를 설레임과 두려움을 한껏 끌어안고 수현은 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외쳤다. 

  "욕실, 입장!"

  "그래, 그래. 입장~"

  루미가 당근을 볶으며 대답했다. 나중에 조잘조잘 말하면 듣고, 말하지 않고 글을 쓰면 곁에서 뜨개질을 해야지. 

  따뜻한 홍차와 오므라이스가 식탁 위에서 기다렸다. 수현이 욕실에서 나와 발그레해진 뺨으로 앉았다. 딱딱한 게 좀 풀어졌네. 루미는 수현을 보고 있다가 수현이 응? 하는 표정으로 웃자 눈을 피했다. 그리고 집게 손가락으로 홍차의 티백을 꺼내면서 말했다.

  "옷 좀... 입어줄래?"

  "아, 응..."

2023.12.11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