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의 레이

자주 뒤돌아보는 습관을 가진 방송노동자.

심신이 허약해지면 영화를 처방하거나 땀을 흘리러 간다.
때때로 멋진 빵을 굽는다.

방송가의 언저리에서

누구나 망한 꿈을 하나쯤 안고 산다. 방송가에 안정적으로 안착하는 것이 오랫동안 내 안에 고인 꿈이었다.  문득 우리가 망해버린 꿈에 대해서 좀 더 쉽게 얘기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면 길 잃은 어른들이 조금은 덜 불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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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꿈을 품고 살다 보면 내가 꿈을 키우는 건지, 꿈이 나를 길들이는 건지 헷갈려서 진실을 분간하기 어렵다. 꿈을 지켜내는 건 식물을 심고 가꾸는 것과 비슷하다. 누구든 씨를 심고 싹을 틔워낼 수는 있지만, 모든 식물이 몇번의 변덕스러운 계절을 견디고 성장해서 열매를 맺지는 않는다. 어떤 꿈은 자라다가 썩거나 시든다. 그런가 하면 햇빛도, 양분도, 물도 열심히 줬지만 벌레가 꼬여서 병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이 과정을 무사히 통과한다면 수확의 기쁨이 기다린다.

파종을 하는 사람은 통통하게 영근 열매를 상상하며 씨앗을 심지만, 인고의 시간을 거쳐 찾아온 첫번째 수확물은 기대보다 작고 볼품없거나 얼룩덜룩하기도 하다. 첫 수확을 하고 나서 힘이 다해 죽어버리는 식물도 있다. 죽음으로 빠르게 직행하는 꿈이 무사히 씨앗을 남긴다면 다행이지만, 생장 기간 동안 들인 정성에 비하면 수확의 시기는 짧고 가끔 허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게 된다. ‘이 식물이 과연 앞으로 몇 번이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살면서 계속 열매를 보려면 결국 화분에 다른 식물을 심어야 할텐데, 뭐가 좋을까?’

조금 이상한 설명이지만, 내가 꿈과 목표에 대해 품은 느낌을 찾아내기 위해 식물에 비유해보았다. 내 꿈의 화분은 어찌 저찌 개화하는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열매를 맺기 전에 시들어버린 바로 그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 다해 가꾸고 붙잡던 꿈이 썩어버렸을 때 그 정성은 어디로 옮겨 가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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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사람들의 사연은 너무나 흔하고 대수로워서 대개 싸늘한 방안을 맴돌다 조용하게 잊히곤 한다. 세상엔 가진 사람들의 견해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과대 대표되고 있으니 나는 약자의 쪽에서 목소리를 내서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무게추가 되고 싶었다. 편향적이지 않냐고? 맞다. 나는 약자에게 편향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건 내가 일찍부터 스스로를 약자로 분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의 사춘기는 2008년 광우병 파동과 2009년 용산4구역 철거민 농성과 참사 사이의 시간대에서 시작되었다. 자본과 정권과 개발론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며 승승장구하던 2010년대 전후, 재개발이 가져올 부가 가치와 세련되게 변할 도시 미관을 기대하는 여론 사이에서 몇몇 방송사와 주간지 중심으로 정부 비판적인 논조의 보도 흐름이 있었다. 이는 2012년 MBC를 중심으로 한 공영방송 총파업으로 이어진다.

그때도 겨울이었다. 잡지 속 인쇄된 상가 사람들은 두꺼운 잠바 차림으로 제대로 씻지도 못해 거칠어진 낯빛을 한 채 낡은 건물 위에 올라서 농성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 어렸고 사람들이 왜 옥상으로 올라갔는지도 잘 알지 못했지만, 내몰린 사람들의 억울한 표정에서 동족의식을 느꼈다. 그리고 어떤 매체들은 그 사람들이 왜 싸우고 있는지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마음 속으로 내 편을 정했다.

여기에 지극히 개인사적인 이유가 일찍이 가치관을 결정했다. 십대 때 동생을 간호하면서 겪은 일들은 내 안에 깊게 새겨졌다. 그 애의 몸은 동네 약사가 시험 삼아 권한 유해성 중금속 약물 처방으로 인해 영구적인 피해를 입었다. 치사량만큼 들어있던 각종 중금속은 한 살배기 아기에게 복구할 수 없는 수준의 뇌병변을 일으켰고 동생은 영영 말하지도, 왼쪽 신체를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찾아갔던 대학병원의 의료진들은 하나같이 이 아기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했다. 엄마는 그 애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당시 대한약사회에서 중금속 약물을 처방한 약사는 죄가 없다며 비호하고 있었고, 엄마는 중금속 유해기준을 바꾸라고 청구하며 수년동안 약사회를 상대로 재판을 벌였다. 길고 긴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는 여러 번 중환자실과 입원병동을 오르내렸다. 집만큼이나 병원에 머무는 날이 많았다. 동생은 7년을 살았고, 한국 나이로 여덟 살이 되던 해 여름날에 땅에 묻혔다. 원래대로라면 그 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것이다. 때로는 희망적이었고 대개 고통스러웠던 7년 동안, 아주 조그맸던 그 애는 조그만 입술 밖으로 단 한 단어도 말하지 못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 약사가 환우 가정에 불법 한약을 권유한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누군가 먼저 고발했더라면, 법이 먼저 마련되어 있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기억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간병, 선잠을 자며 20분 단위로 동생의 목에 꽂힌 삽관 사이로 빨대처럼 가느다란 주황색 카테터를 넣어 석션을 하던 감각, 식구들의 어투에서 사라진 다정함, 각종 영수증과 병원비 고지서, 병원 간이 침대에서 엎드려 읽던 도서관 책들과 신중하게 고르던 편의점 간식, 교복 차림으로 동정과 비웃음과 격려 사이를 오가던 시간, 스스로 차려 먹던 빈약한 요리들, 수년 동안 법원을 드나들며 화에 물든 엄마의 등, 한 아기가 병들고 망가지고 나서야 개정된 중금속 규제 기준, 동생이 세상을 떠난 바로 그해 대법원에서 내려진 공허한 승소 판결…

결국 우리는 이겼다. 싸워서 지키려고 했던 애를 잃고 나서야 이겼다.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일련의 경험은 내게도 얼룩 같은 강박을 남겼다. 이해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혼란과 죄책감이었다 나는 남겨진 내 몫을 하며 살고 싶었다. 그늘없이 보란듯이 번듯한 어른이 되어 ‘살아남은 가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집착했고, 그러려면 이 모든 것들이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만 했다. 어린 동생은 죽었지만 나는 튼튼하고 살아있다고 세상에 발악을 하고 싶었다. 말하고 쓰는 사람이 되어서, 언젠간 세상에 널린 ‘우리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기겠다는 포부를 감히 품었다.

그게 진짜 이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자기가 심은 씨앗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품 속의 화분을 뺏기지 않으려 움켜쥐는 고집 센 애나 다름없었다.  

여러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겨울이 되면 홀로 병원으로 가는 오르막길을 걸을 때 벌겋게 튼 양쪽 손가락을 짓누르던 무거운 이불 가방끈의 감촉이 불현듯 떠오른다. 동생이 세상을 떠나던 날, 아침 면회 시간에 맞춰 병원으로 걸어가는 길에 노랗게 떠오르는 해를 보며 마지막인지도 몰랐던 이불 가방을 들고 걷던 때도. 보호자 대기실에서 졸면서 들었던 유독 길고 기이했던 오전의 소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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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0년이 지났다. 나는 얼레벌레 방송판으로 흘러 들어와 있었다. 근데 연출이 아니라 구성작가로…. 방송 일을 빨리 배우기 위해 선택한 구성작가 일이었는데 이왕 잡아본 거 후회는 남기지 말자는 생각으로 코너 입봉을 일찍 했고, 널뛰듯 이직을 한 끝에 중장편 입봉도 빨리 하는 루트를 운좋게 탈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벌써 몇년이 흘러버렸다.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서 방송 PD와 방송 작가의 업무 분담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흔히 작가진들 사이에서는 '영상에 관한 것은 피디가, 글에 관한 것은 작가가 한다'라는 인식도 있지만 그렇게 딱딱 구분되지는 않는다. 피디가 글쓰는 일을 작가에게 일임하는 경우는 본인이 욕심이 없거나, 체계화된 외주 프로덕션 소속일 때 흔히 보인다. 공중파 프로그램의 경우, 본사 소속의 고연차 PD가  프로그램의 골조를 직접 기획하는 경우가 많고, 진행과 연출 외에도 스탭 충원에 대한 결정권 또한 가져간다. 여기서 ‘구성작가’로 통칭되는 메인작가는 보통 PD에 의해 구인된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부터 포스트 프로덕션 단계까지 개입하는 포지션으로,(예산과 효율성 등의 이유로 나중에 구인하기도 한다) 메인 PD를 도와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골조를 구체화하는 역할을 한다. PD가 같이 오래 작업했거나 미리 염두에 둔 작가를 뽑은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 상부에서 기획안이 승인된 후에 프로그램의 구성을 담당할 작가를 채용한다.

그러면 이렇게 내정된 메인작가가 후배 작가를 데려오거나 막내작가 내지는 자료조사원으로 불리는 저연차 구직자를 뽑아 아이템 서치, 자료조사, 사전 인터뷰, 섭외, 의전 등을 분담시킨다. (다만 예능이냐, 교양이냐에 따라 팀의 규모와 상세 업무, 조직 문화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시라! 예능국에서는 교양국보다 작가의 업무량과 발언권도 조금 더 강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제아무리 뛰어난 프리랜서도 회사의 컨텐츠를 만들어 주는 조건으로 고용된 이상 권력구도는 확실하다. 

자연히 대감집 (방송국) -  대감집의 직속 고용인 (본사 PD) - 작가진으로 이어지는 힘의 구도가 생긴다. 물론 탁월한 실력과 센스로 피디 못지 않은 존재감을 드러내고 프로그램에 자신만의 색깔을 가미하는 걸출한 작가님들도 여럿 계시다. 하지만 그분들이 그러한 능력에 걸맞는 대우를 받고 있느냐고 질문한다면, 글쎄. (예산을 지출하고 집행하는 것은 피디의 일이다!) 물론 나의 경우 경력 내내 교양/다큐멘터리 쪽에서만 일했기 때문에 예능 프로그램의 상황은 이와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작가진은 하나의 팀으로 대본과 자막, 내레이션을 쓰고, 어떤 출연자를 방송에 출연시킬지 참고하기 위한 자료로 사전 인터뷰를 진행하고 연사 및 출연자를 섭외한다. 작가라는 말이 붙었으니 글을 쓰는 것이 주 업무일 것 같지만, 정말 글의 흐름을 갖춘 글을 쓸 기회를 얻는 것은 훨씬 고연차가 된 뒤의 일이다. 실제로는 전화기를 붙들고 귀에 습진이 나도록 통화하고 출연자를 어르고 달래며 소통하는 것이 주 업무이다. 경우에 따라 정산을 비롯한 간단한 행정잡무를 처리하기도 한다.

부끄럽지만 그때는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몰랐고 원래의 옵션에도 없었다. 그저 PD가 되기 전에 방송 전반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내가 방송일을 배운 첫 번째 일터는 K사였다. 그곳에서 코로나19 확산 초기 당시 상황을 짚어 나가는 특집 다큐멘터리 제작팀에서 일했다. 방송국 공개채용을 통해 들어간 정규직 일자리가 아닌 프로젝트성 임시직이었지만, 어찌보면 레귤러 프로그램보다 많은 눈동냥을 하게 해 준 곳이었다. 당시 나를 데려간 책임 프로듀서분은 원래 조연출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는데, 샘플로 제출한 작문과 생각보다 빈약한 기술 수준을 보더니 방송의 처음과 끝까지 모든 과정을 후방에서 배우기 좋은 작가진으로 먼저 들어가 일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특집 제작팀 사무실은 K사 본관 옆에 떨어져 있었다. 다 쓰러져가는 70년대 풍 정부 공급 저층 맨션 단지를 개조한 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연구동’이라고 불리는 이 맨션 단지의 각 동은 장기간 여유를 두고 제작하는 특집성 프로그램 사무실, 노조 본부, 아트팀, 공채 개그맨 연습실 등 잡다한 용도로 기능했다. 한때 사내 어린이집으로도 쓰였던 곳으로, 과거 주공아파트 가정집이었던 벽 구조가 그대로 남아있어 매순간 공영방송의 재정난을 여실히 실감하게 했다. (어떤 직원들은 우스갯소리로 땅값이 얼마나 올랐겠느냐며, 연구동 부지만이라도 매각해서 운영에 써야 한다고도 했다.)

나는 빈 책상들 사이에서 해가 잘 드는 명당을 눈치 없이 골라잡고 일주일쯤 혼자 놀듯이 사무실에 앉아있다. 일일업무라고 하면 그날의 코로나 19 관련 뉴스를 서치해서 매일 엑셀에 일지를 기록하는 게 다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ㅁ월 ㅁ일 00시 요양병원 집단 감염 N명 발생.’ ‘질병관리본부, 코로나19 국내발생현황 N명 집계’.매일 뉴스 포털과 당시 질병관리본부 코로나19 알리미 사이트에 들락거리며 영문도 모르고 혼자 공부라도 해두자는 마음으로 자료만 질리게 읽었다.

연차가 거의 20년에 달했던 메인 작가님은 회의날을 제하고 얼굴을 뵐 일이 없었고, 가끔 카톡이 오면 간단한 자료나 뉴스기사를 스크랩해서 전달하는 식이었다. ‘방송일은 굉장히 바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느슨해도 되는 건가?’ 싶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렇게 한가한 경우는 매우 드물고, 내 경우 본격적으로 일손이 필요한 시기보다 훨씬 일찍 나오게 해서 미리 예습을 시켰다는 설명을 들었다.

실제로 본격적으로 제작단계에 들어갔을 때, 또래의 사수가 없었기 때문에 매일 슈퍼마리오 생명을 1개씩 까먹듯이 여기저기 엉뚱한데 박아가며 일을 배웠다. 일례로 당시 감염병 거점병원의 경우를 들자면, 모든 방송사와 일간지가 촬영 허가를 원하는 치열한 섭외 대상이었는데, 그때 모 병원에 전화를 돌리면 이미 M사가 5일짜리 촬영을 하기로 해서 거절당하고, 수도권에 있는 다른 병원도 모 방송사와 특집을 진행한다는 답변을 듣기 일쑤였다. 게다가 한참 대단하게 느껴지는 전문가나 교수진의 개인 연락처를 찾아 직접 통화로 섭외를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 매우 어렵게 다가왔다. 여기에 락다운에 처한 해외 국가에서 생활 중인 한국 교민을 섭외해 달라는 요청에 영문도 모르고 이탈리아 베르가모라는 소도시 현지의 각종 한인 시설에 전화를 돌려 맨땅에 헤딩하며 현지에서 락다운 생활기 셀프 인터뷰를 찍어달라고 난감한 부탁을 해야하는 미션도 있었다.

워낙 섭외할 곳도 많고 경쟁 언론사도 많다보니 초반엔 섭외가 쉽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섭외를 잘 할 수 있냐"는 질문에, 메인피디와 선배 작가께서는 섭외는 그 사람 하기 나름이라며 우리 방송국을 대표하는 마음으로 정중하게 요청을 드리라는 식의 조언을 돌려주곤 하셨다. 그러니까 그 말은 재량에 맡기되 잘 하라는 뜻이었다. 나는 부족한대로 실수하며 배웠다. 어떤 날은 메인 작가께 조금 주워듣고, 어떤 날은 책임 프로듀서께 또 조금 주워 듣고, 어떤 날은 메인 피디에게 요령을 듣고, 자잘한 업무는 생뚱맞게 FD언니를 따라다니는 식으로 옆에서 하나하나 물어볼 사람 없이 일을 배우는 식이었다.

현지에서 촬영해 온 해외 명사의 인터뷰를 한국어 파일로 번역해줄 번역가와 촬영본을 텍스트로 변환하는 프리뷰어를 구인하는 것도 자잘하지만 빼뜨릴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 조연출의 업무로 취급되는, 뉴스 자료와 외신 영상을 찾고 아카이브실에서 영상 출고를 신청하는 것도 내 몫이 되었다. 일은 사소한듯 많았고 급여는 표준임금 수준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냥 배워가는 재미에 뿌듯하고 좋았다. 이렇게 하나하나 배워가고 눈치도 챙기다보면 내 미래도 저 방송국 안쪽 어디에 있을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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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터의 매운맛은 매년 순진한 기대를 배반했다. 첫 번째 일터에서는 그래도 좋은 팀을 만나 공부하고 실패할 수 있는 기회 속에서 일을 배울 수 있었지만, 그 이후의 프로젝트에서는 당연히 그런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프리랜서지만' 밤샘과 주말 근무는 언제 생겨도 당연한 일이고, 연차나 연장수당 같은 건 '프리랜서니까' 있을 수 없었다. 아이템 후보를 올리고, 인지도 있고 말맛을 살릴 줄 알며 섭외의 가망성이 있고 출연료선이 합리적인 진행자의 리스트를 제출하는 것도 '프리랜서의 일'이었다. 이틀 안에 간암에서 완치된 50-60대의 수도권 여성을 섭외하라는 구체적인 미션이 주가 되는 일이 허다했으며, 선배의 카톡에 1분내로 답변하지 않으면 불같이 재촉하는 전화를 받는 팀도 있었다. 사석에서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아 약속 자리에서 먼저 양해를 구하고 급하게 메인작가나 피디가 요청한 자료를 전달하고 실시간으로 섭외를 해야하는 상황도 적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방송작가'의 업무가 나의 환상과 다르게도 상당히 넓은 분야에 자잘하게 걸쳐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방송작가의 피라미드에서 말단에 있는 막내작가는 정규직 직원들과 긴밀하게 협업하며 정해진 장소에 출근하여 업무지시를 받았지만,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내가 하는 일이 사각지대에 걸쳐있다는 생각이 강해질 수록 나의 일과 나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는 마음이 커져갔다. 그렇다면 빨리 경험해보고 옮겨가자는 판단을 했다.

열심히 하면 뭔가 달라질까 싶어서 1년을 채우고 바로 서브입봉을 하고, 연차에 비해 빠르게 투잡을 뛰어보기도 했다. 세컨잡을 하던 회사에서 콜을 받아 신규 편성 프로그램에 투입되어 조연출로 직무를 바꿔보기도 했다. 지방 촬영을 따라다니고 밤낮과 휴일을 바치며 일했지만 열심히 일한 끝에 뭔가 상승세를 타는 거 같았지만, 쌩뚱맞게도 돌아온 것은 지방 촬영지에서의 성범죄 피해와 제작사의 2차 가해였다. 그 뒤로 내 꿈의 화분은 더욱 빠르게 썩어갔다. 3년차 때 장르를 아예 바꿔 메인 입봉을 했다. 내가 쓴 내레이션과 대본에 대한 책임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작지만 묵직한 신호였다. 이건 더 이상 꿈이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나는 방송가의 언저리에서 조금씩 안쪽으로 걸어들어가며 기쁨과 슬픔을 만났다. 많은 사회초년생들이 그러하듯 구르고 실수하고 나아지며 이제 겨우 4년차가 되었지만, 처음 꿈을 화분에 심었을 때의 마음가짐을 이곳에서 실현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늘어난 것은 겁과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다. 열매 맺지 못하고 썩어버린 화분을 쳐다볼 때 마다 복잡한 기분이 된다.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수치심, 무엇인지도 몰랐던 목표를 만들고 어렸던 너를 생각하며 이겨서 돌아오겠다고 빌었던 치기어린 날들. 애쓰기를 포기하고 나태함에 굴복해버리고 싶은 유혹이 가득하다. 그러게 화분에 뭘 심었는지도 몰랐으면서 굳이 지키겠다고 기를 쓰고 그랬어. 조만간 저 낡은 화분 비워버려야지. 비워버리고 뭐든 새로 심어버려야지. 생각한다. 봄이 오면 싹이 틀 수 있게. 그땐 썩지 않게 내가 걔를 돌봐주겠다고 다짐하며. 

💌인사하며

구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제게는 분량 조절에 실패하면 마감기한을 놓치는 못된 버릇이 있군요. 다시 한번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뿌얘진 꿈과 고역스러운 자기연민 사이에서 방황하는 현재에 대한 고백입니다. 언젠가부터 내가 이렇게 된 게 일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 고민하곤 했는데요. 막상 일을 시작한 뒤에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게 아주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어린 날 품었던 '우리 같은 사람들 얘기를 듣고 알리겠다'는 꿈이 점점 비현실적으로 멀어진다고 생각했어요. 우습지요? 특정한 직업에 종사하는게 야망을 이루는 가장 좋거나, 유일한 방법이 아닌데도 그렇게 자조하고 포기를 떠올린다는게요.

이 글은 여러 면에서 뒤로 멈칫거립니다. 첫번째 이유는, 어떤 분야에 대해 의견을 말하기에는 제 경험이 다소 짧고 제한적이며 매우 주관적인 해석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과 조직에서 받은 경험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고통을 느끼고 그 기억으로부터 피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글에 숨기지 못해서요. 어떤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직업'을 갈망하는 마음에는 조금 순진한 부분이 있지요. 저는 스스로를 두고 '이제는 예전만큼 열심히 하려고 애쓰지 않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구태여 이 주제로 글을 쓰고 고백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영하 18도의 추위가 강타하는 날에 저의 감정적 토사물까지 보게 되신 오늘의 독자분들께는 미리 죄송한 마음입니다...🥣)

비록,  ‘생업으로서 일터'에서 겪은 일들에 영향을 받아 N년째 업 앤 다운을 반복하며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수업료로 지불하며 배워나가고 있지만, 저도 궁극적으로는 ‘말하고 쓰는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진짜 목표를 이루는 방법을 찾아가고 싶어요. 먼저 드린 레터에서 소개한 여러 취미와 괴랄한 강박을 동원하여 곧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신 구독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모두들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