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살 때 저는 평생 결혼 안 할 줄 알았습니다. 하기 싫었고 감당할 자신도 없었어요. 근데 또 비혼주의자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더라고요. 민주주의, 공산주의, 평등주의, 평화주의, 개인주의, 원칙주의. 뒤에 주의가 붙은 것치고 제대로 실천되고 있는 사상이 없는 것 같아서 ‘이거, 이거 비혼주의라고 했다가 진짜 비혼 못하는 거 아닌가?’ 하고 내심 불안했거든요.

저한테 제일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저희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가 다니시던 절에 용한 스님이 계셨는데요. 민간신앙과 종교의 통합이라고 해야 할까요? 연초마다 불심이 남다른 불자들에게 삼라만상의 진리, 토정비결을 봐주시곤 했어요. 스님은 할머니께 셋째 네 딸이 가문을 빛낼 것이다, 그리고 (또는 그런데) 외국인을 만날 것 같다고 했대요. 외국에서 살 수도 있다는 건데 할머니가 확대해석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오일장에 가는 길에 할머니는 중학생이 된 손녀에게 계시처럼 외칩니다.

“넘의 나라 것은 안된다!”

그 당시 영화 <나쁜 녀석들>을 보고 윌 스미스에 빠져 있었던 손녀는 일단 반박을 시전합니다.

“할머니, 지구촌 몰라요, 지구촌? 글로벌 세상 인데 왜 안돼!”

“다문화 가정이 좋드나??”

할머니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안 통하고 문화도 다른데 뭐가 좋냐 고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개인의 외침은 큰 효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결혼 안한다는 제 발언이나 한문화가정을 지키고 싶었던 할머니의 호통보다 강력한 건 토정비결이 아닌가 싶어요. 왜냐면 저는 내뱉은 말에 입을 싹 닦고 외국인과 진짜 결혼해서 살고 있거든요. 그 스님 참 용하시죠.

저희 집 어르신도 사주 때문에 불안하셨는지 저한테 자주 우리 것(=한국 남자)이 좋은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랬던 어르신이 제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 입술을 꽉 깨물고 굳은 결심을 한 듯 말합니다.

“중국인 까지는 괜찮아. 영국 가서 돈 많고 어린 중국인 만나도 돼.”

저는 이 순간을 신토불이 민족주의가 토정비결과 자본주의에 굴복하고 만 순간이라고 기억합니다. 얘가 하는 짓을 보니 사주가 맞을 것 같고, 집안의 기둥인 줄 알았는데 아무리 봐도 한국에서 어르신을 기쁘게 해줄 만큼 성공하거나 부자한테 시집 가진 못할 것 같았나 봐요. 그때부터 저에게 돈 많은 중국인을 만나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호강시켜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어르신을 실망시킵니다. 튀르키예 남자를 만나서 같이 살기 시작한 겁니다. 그 소식을 듣고 이모들이 대성통곡을 했대요. “아야, 두유가 뭐가 모자라서 외국 놈을 만난 다냐. 어쩌다가 그런!!!” 저희 이모들이 다 목소리 크고 에너지가 넘치세요. 그런 이모들이 통곡하는 모습을 저는 장례식에서만 봤거든요. 아마 이모들 마음 속에서 외국인과 결혼하는 저는 거의 죽은 거나 진배 없는 셈인 것이지요. 아이고 아이고.

아니, 왜 영국까지 가서 터키 사람을 만나!! 터키는 우리보다 못 살잖아! 미국이나 영국처럼 선진국이면 몰라. 거기는 중동 아니냐. 모아둔 돈 걔가 다 털어가면 어떡하려고 그래. 다들 한국 좋다는데 왜 너만 정신이 이상해져서 난리야.

정원 있는 집에 살며 주말이면 고무로 된 긴 호스로 잔디에 물을 뿌리며, 머리는 작고 눈은 큰 혼혈 아이들과 꺄르르 뛰어 놀면 모를까, 어르신이 남부끄러워서 사람들한테 말도 못한다고 하더군요.

원래 국제 연애가 좀 그런 것 같습니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a.k.a. G7 국가)에서 온 외국인과 연애한다고 하면 집안이 어떤지, 돈이 얼마나 있는지 잘 안 물어봐요. 낯설거나 피부색이 어두울 것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사귄다고 하면 부연 설명이 붙어야 합니다. “근데” 뒤에 붙는 이야기들은 대략 이렇습니다. 집이 궁궐이래, 그 나라 귀족이래, 중견 기업 오너 아들이래, 지평선 끝까지 부모님 땅이래.

질문도 많습니다. 저는 친절하게 답해 드립니다. 응, 낙타 타고 다녀. 집에 낙타 스무 마리. 석유 부자. 좀 가져 갈래? 모스크 가서 이슬람 세례 받았지. 히잡 쓰지. 머리 신경 안쓰고 좋지 뭐. 부인 여러 명이냐고? 나 네번째. 다행이지 막차라서. 내가 마지막 사랑 이래.

어르신께도 자본주의 이념에 맞게 성실하게 설명 드렸습니다. OO 대학을 나왔는데 터키에서 어느 정도 수준이며, 수능 몇 등 했고. 뭐 했고 뭐 하고 뭐 할 거고. 아버지 뭐 하시고, 어머니 뭐 하시고. 어르신, 김대중 선생님 존경 하시죠? 터키의 민주당. 독재자 대통령이랑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아저씨들 있는 당 있어요. 응 거기 국회의원이셔. 당대표가 차기 대통령 될 건 가봐(안타깝게도 정권 교체는 실패했습니다.).

잠시 만족하는 듯 했던 어르신은 남편의 안부를 묻습니다. 걔는 생년월일시가 어떻게 되니. 걔가 하는 일을 자영업이라고 봐야 하나? 철학원에서 너 자영업자 만나면 애 셋 낳고 이혼한다고 했어. 사업하는 사람은 절대 안 된대. 어디 직장 다닐 생각 없대?

돌아돌아 다시 사주명리학으로 귀결됩니다. 입신양명 후보자였던 저는 가문을 빛내지 못했지만 어르신은 제가 네덜란드로 이민 갈 수도 있다는 말에 희망을 걸고 계십니다. 중동에서 G7 국가*로. 글쟁이에서 직장인으로. 예술가의 아내에서 직장인의 아내로. 2인 2묘 가족에서 아이들이 조잘거리는 4인가족으로. 제 사주팔자에는 어디까지 쓰여 있을까요?

*G7 국가는 선진국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쓰였을 뿐, 네덜란드는 G7 국가가 아닙니다. G7 국가에는 미국, 영국, 캐나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일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